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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동학사-계룡산 신령한 산줄기 아래 충신들의 얼이 서려있는 곳역대 왕조 충신 기리는 숭모지 특징신천영의 난, 6·25때 소실 후 복원, 국내 최초 비구니 승가대학도 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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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2014.11.01  12:4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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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계룡산 동학사

<신 청풍명월의 지난소식> 전북 장수군 장수읍 수분리 덕유산 기슭의 뜬봉샘에서 발원한 금강은 무주~영동~옥천~대전~부여를 거쳐 장장 407.5㎞를 흘러서 서해로 빠지는 국내 여섯번째로 큰 강과 백두대간 중 태백에서 갈라선 차령은 충청북도와 경기도의 경계를 이루며 1000m를 넘지 않은 낮은 산들로 이어지면서 충남지방을 형성하고 있다.

이 차령을 기준으로 할 때 이남은 충청지방의 동남부에 해당하는 호서평야·계룡 산괴 대전 분지와 금산 고원을 이루고, 이북인 충청 서북부 지방은 천안·아산·예산·당진·서산 등 평야를 이룬다.

여기에서 빼놓을 수 없는 계룡산(847m)은 삼국시대부터 국내외에 널리 알려진 천하의 명산으로서 흔히 ‘공주 계룡산’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대전시 유성구와 공주시 반포·계룡면과 논산시 두마면 사이에 있다.

계룡산은 백제가 475년 웅진성으로 천도하고, 그 이후에도 가까운 사비성으로 천도했어도 자주 교류하던 중국 사신들의 입소문에 힘입은바 크지만, 무엇보다도 나말여초부터 유행했던 풍수지리설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즉, 계룡산은 난세에 병란을 피할 수 있는 십승지지중 하나로 알려졌고, 조선 태조 이성계가 무학 대사의 천거로 계룡산 남쪽 기슭인 신도안에 도읍지를 정하고 1년 가까이 공사를 하다가 황희, 정도전 등 성리학자들의 반대로 한양으로 옮겼다는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그 후 600년이 지난 3공화국 시대에 신도안은 다시 천도설이 떠돌다가 대통령이 시해된 이후 시들해지고 삼군본부(계룡대)가 이전했지만, 그 지척에 행정도시가 건설된 것도 예삿일은 아니라 할 것이다.

대전시와 공주시의 접경인 삽재 고개(속칭 박정자 고개)를 넘어가면 박정자 삼거리인데, 이곳에서 좌회전하면 동학사 입구이다.

우선, 계룡산 동쪽에 있는 동학사는 계룡산 주변의 다른 절들이 모두 백제시대에 창건된 것과 달리 신라의 삼국통일 후에 창건된 사찰이고, 또 처음에는 부처를 모신 작은 암자로 시작되었으나 이후 역대 왕조의 임금과 충신들을 기리는 숭모지로서 각광을 받으면서 큰 사찰로 변하게 되었다는 특징을 갖고 있다.

즉, 신라시대에 상원조사가 계룡산에 상원사라는 암자를 짓고 수도하다가 입적한 후, 724년(신라 33대 성덕왕 23) 상원조사의 제자 회의화상이 스승의 사리탑을 건립하고, 문수보살이 강림한 도량이라 하여 절 이름을 청량사(淸凉寺)라 한 것이 그 시초인데, 동학사에서 갑사로 넘어가는 계룡산 중턱의 등산로에 있는 청량사 터가 애당초 상원조사가 불법을 닦을 때의 암자인 상원사이다.

이곳에는 호랑이가 물고 온 처녀와 상원조사의 애틋한 불심의 전설이 전해오고 있는데, 신라 선덕여왕 15년(646) 상원 스님이 이곳에서 수도하고 있을 때, 어느 날 밤 커다란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났다.
깜짝 놀란 상원이 호랑이를 바라보니 호랑이는 그를 잡아먹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매우 고통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이었다. 용기를 낸 상원 스님이 자세히 살펴보니, 호랑이 목에는 커다란 뼈가 걸려 있어서 스님은 팔을 호랑이의 입 속에 집어넣고 그 뼈를 빼내주었다.
그러자 호랑이는 어디론지 사라지더니, 얼마 후 아름다운 처녀를 업어다 놓고 갔다. 상원은 기절한 그 처녀를 정성껏 간호하여 소생시켜주었더니, 정신을 차린 그 처녀는 상원이 자기의 목숨을 구해준 은인이라면서 상원의 아내가 될 것을 고백했다.
하지만, 스님인 상원은 "부부의 인연보다는 남매의 인연을 맺자"고 하여 함께 수도를 하게 되었고, 그 후 두 사람은 한날한시에 열반했다.
생전에 호랑이에게 물려가서 죽은 줄만 알고 있던 경상도 문경에 살던 처녀의 아버지는 두 사람의 뜻을 가상히 여겨서 그 곳에 탑을 세운 것이 남매탑이라고 하는데, 백제시대의 석탑 형식을 따른 고려시대의 탑인 5층 석탑(보물 제1284호)과 7층 석탑(보물 제1285호)을 사람들은 남매탑 또는 오뉘탑 이라고도 말한다.

그런데,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건국되자 고려 태조 20년(937) 신라 조정에서 대승관(大丞官) 벼슬을 했던 유차달(柳車達: 문화유씨의 시조)이 지금의 동학사 대웅전 부근에 시조 박혁거세, 19대 눌지왕 때 고구려에 인질로 끌려갔던 왕자 복호, 왜에 인질로 갔던 미사흔을 구하고 대신 죽은 충신 박제상의 초혼제를 지내기 위해 ‘동계사(東鷄祠)’를 지었는데, 신라를 추모하는 승려들이 운집하여 청량사와 동계사를 포괄하는 동학사(東鶴祀)로 되었다고 한다.

사실 동학사는 백제시대이래 당시 충청지방에서 가장 큰 도시인 공주 쪽에서 볼 때, 계룡산의 깊은 산속에 세운 것으로서 사찰의 의미보다 이처럼 임금과 충신을 모시는 사당으로 확장된 셈이다.

그 후 조선이 건국되자 태조 3년(1394) 야은 길재 선생이 동학사의 승려 운선스님과 함께 이곳에 단을 쌓고 고려 태조와 공민왕, 정몽주의 제사를 지냈으며, 1399년에는 고려의 유신 유방택도 이곳에 와서 삼은각(三隱閣)을 짓고 여말삼은(목은 이색, 야은 길재, 포은 정몽주)을 모셨다.

또, 조선 세조 2년(1456) 매월당 김시습이 세조에 의하여 왕위를 빼앗긴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성삼문 등 사육신의 넋을 위로하기 위하여 초혼각을 짓고 제사를 지내는 등 조금은 반정부적이고, 조금은 성리학적인 제사 터가 되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1458년 생육신인 천재 김시습을 설득하러 직접 이곳에 내려왔던 세조가 이곳을 둘러본 뒤 단종을 비롯하여 사육신, 동생 안평대군, 금성대군 등 자신에게 죽음을 당한 이들을 위한 초혼제를 지내도록 하면서 동학사라는 사액을 내렸다고 한다.

사찰 동학사 건물 아래편에 사당인 동학사와 삼은각이 있고, 그 옆에 담장을 나란히 한 초혼각이 있는데, 초혼각은 1904년 조선 고종 때 숙모전(肅慕殿)으로 개칭되었다(지방기념물 제18호).

이처럼 동학사는 사찰 이외에 역대 왕조의 충신들을 모시고 제사하는 기능이 각별했던 것이 특징인데, 그것은 아무래도 계룡산이 주는 풍수지리설의 영향 때문이다.

그런데, 동학사라는 절 이름은 동쪽에 학처럼 생긴 바위가 있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도 하고, 또 포은 정몽주 선생이 성리학자를 위한 제사지내는 곳이라는 "설단향사이후 동방이학지종(設壇享祀以後 東方理學之宗)"이라는 말에서 기원했다는 설이 있지만, 절 이름은 고려 태조 때 지어졌고, 포은은 고려 말 인물이니 아무래도 뒤의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아무튼 동학사는 영조 4년(1728) 신천영(申天永)의 난으로 모두 소실된 것을 1814년 월인선사가 일부 중수에 나섰으나, 6?25 때 다시 불 타버린 것을 최근에 건물을 다시 짓고 있다.

매표소와 국립공원계룡산 사무소가 있는 곳에서 약 600m쯤 올라가면 미타암, 연주암등 작은 암자가 줄지어 있는 끄트머리에 동학사 대웅전이 있다. 경내에는 3층 석탑(문화재자료 제58호)과 1956년 경봉 스님이 국내 최초로 세운 비구니 승가대학도 있다.

박정자 삼거리에서 동학사 입구까지 양쪽 계곡에는 13~4개소의 조선시대 가마터가 남아 있는데, 특히 계룡대가 있는 신도안쪽으로 200m쯤 가다가 청소년야영장 부근 길가에 조선시대 철화 분청자기와 조선백자를 만들었던 학봉리 가마터가 온전히 남아있다(사적 제333호). 이 학봉리 유적은 유성골프장이 있는 대전 학하동의 사기막골과 함께 고려 말 “공주 명학소의 난”이라는 천민의 난이 일어났던 곳이다. <법무사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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